|
|
|
|
|
|
|
* Today - | Yesterday - * Total - |
|
|
« 2025/01 »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
|
|
|
|
|
|
|
|
|
|
|
분류 전체보기 : 해당되는 글 1369건
|
|
변화가 없는 삶은 불행하다.
부자들에게는 불행하고 가난하였던 과거가, 나의 경우도 그렇듯이 종종 훈장처럼 따라 다닌다. 그리고 그들의 성공담은 불행한 상황을 자기 힘으로 역전시켜 행복한 상황으로 만든 사례로 종종 인용되곤 한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가난하여 끼니 조차 마련하기 힘들었는데 노력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곧 그들의 삶이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었음을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푸세식 변소에서 냄새를 참으며 용변을 보던 사람이 수세식 양변기에서 쾌적하게 용변을 본다고 해서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돈이 많아 지면 불편하고 구차한 환경이 편리하고 쾌적한 환경으로 변할 뿐이다. 생활 수준이 높다고 해서 높은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비슷한 예는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공부를 열심히 하여 유명한 대학에 들어갔다거나 수년간 어렵게 공부하여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성공담과 관련하여서도 나타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마치 "불행 끝, 행복 시작"의 사례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좋은 학력을 갖게 되었을 뿐이고 어렵다는 시험에 합격하였을 뿐이다. 그렇게 하여 이 사회에서 얻게 될 대가가 좀 많아지게 되었다는 것을 행복의 필수조건으로 착각하지는 말라.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보여주고 나서 "꿈을 가져라" 혹은 "야망을 가져라"고 말하는 것은 종종 마치 명예나 지위,돈,학벌 등에 대한 꿈과 야망이 성취되어야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듯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이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든 성공하게 되면 기쁨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기쁨은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 따라 잠시 뿐이며 그 어떤 성공이건 간에 결코 행복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목표가 성취되면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 뿐이지 그 성취감이 행복과 동의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어갔다고 해서 행복해졌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TV 프로그램 '성공시대'(이미 방송이 끝났지만 인터넷에서 볼 수 있으므로 가능한 많이 보아라)나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을 본받아 "나도 저렇게 되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저런 사람이 안 되면 내 삶은 불행하여 진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 분명히 말한다. 그 어떠한 실패도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그 어떤 삶도 열등하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 내가 가진 자로서 글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못 가진 자와 실패한 자를 "못난 놈", "불행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내가 철저하게 비난하고 꾸짖는 대상은 시간을 우습게 여기는 게으름과 나태함에 빠져 자기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서도 돈과 성공과 행복을 아주 “편안하게” 꿈꾸는 사람들이다. )
행복은 우리가 소유한 것들과 비례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반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말한다면, 행복은 우리가 소유한 것들이 유형의 것이건 무형의 것이건 상관없이 그 양과 질이 증가하는 과정이 계속될 때 얻어진다. 미국 심리학자 데이비드 마이어스( David G. Myers) 역시 '행복의 추구'(The Pursuit of Happiness : Discovering the Pathway to Fulfillment, Well-Being, and Enduring Personal Joy)에서 “고정된 고소득보다는 소득이 증가하는 상태가 더 낫다”고 결론지었다. 소득의 많고 적음 그 자체가 아니라 소득이 매년 오르고 있을 때 인간은 행복을 더 많이 느낀다는 것이다. 매년 연봉 백만달라를 계속 받는 사람 보다는 10만 달라의 연봉이 매년 증가되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말이다.
나는 그의 말에 한 가지 더 붙이고 싶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변화를 스스로 일으켜 그 어떤 분야에서든지 자신의 가치를 계속 증대시켜 나갈 때 행복을 맛볼 수 있다"고 말이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에서 주인공인 25세 여성 안진진의 이모는 심심해 하는 부유층 사모님이다. 돈도 잘 벌고 착실하기까지 한 멋쟁이 신사 남편을 둔 이모는 남들이 보기에는 행복이 넘쳐 나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그 잘 살던 이모가 너무나 행복한 일상에 지쳐 자살한다. 부자였지만 삶에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이 종종 자살하는 이유 역시 삶에 변화가 없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고 나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나의 미래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오판하고 그런 자살 시도를 하였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행복의 추구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고 했다. 그 권리를 누리려면 스스로의 변화를 먼저 주도하라. 남이 하면 따라 하고 남이 좋다면 따라서 좋다고 박수치는 그런 삶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뿌듯하여 질 수 있는 주체적 삶을 찾아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삶은 이미 생명이 죽은 삶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에 익숙하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당신이 버는 돈의 액수가 작아서 불행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천만의 말씀이다. 당신이 돈을 얼마나 벌든 간에 삶에 변화가 없고 뿌듯함이 없다면 결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변화시키고 증가시키는 노력을 할 때 행복은 매일같이 주어지는 법이며 덤으로 뿌듯함 마저 느끼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그 변화의 방향을 어느 쪽에다 두는가에 있다. 그 방향은 오직 두 가지 뿐이다. 그 하나는 이 사회에서 대가를 더 많이 받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일을 하는데 있어서 변화를 줄 수 있는 지식들을 추구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사회에서 대가를 받는 것과는 관련 없이 인간으로서의 성숙함을 지향하는 것이다. 참선을 하면서 자기를 바라 본다거나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생을 배운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돈과 관련되지 않은 것에 그 방향을 두고 있다면 당연히 돈은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변화가 주는 뿌듯함은 곧 돈 문제로 인하여 상처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실한 신앙인들처럼 자족과 감사의 생활을 영위하며 살 “자신이 있다면”( 사도 바울 같이 말이다) 계속 그렇게 돈과 거리를 두고 살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가치 있는 삶의 한 형태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대가를 더 받는 쪽에다 변화의 방향을 두고 있다면 그 대가 자체 보다는 변화의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에 관심을 두어라. 그렇게 하면 행복감과 뿌듯함을 매일 맛 볼 수 있고 돈은 저만치에서 뒤따라 오게 된다.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고 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하여 삶과 생활 속에서 실천할 때 언제나 나는 뿌듯함과 행복감에 충만하였다. 30대 초에 내가 컴퓨터와 씨름을 하다가 새벽 4시에 사무실을 나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던 집으로 가면서 어둠 속에서 느꼈던 그 가슴 뿌듯함을, 20대에 내가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새벽녘이 밝아오는 가운데 끝냈을 때 느꼈던 그 환희에 찬 뿌듯함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돈? 돈은 그 뒤에서 성큼성큼 따라왔다.
비록 당신은 돈이 뒤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정말인가 의심하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고 싶겠지만 내 말을 믿으라.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너무나 또렷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이미 살아 보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변화가 싫다고? 지금 그 상태로 있는 게 좋고 행복하다고? 내가 알기로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에 빠진 사람, 무소유 신봉자, 신실한 신앙인 세 종류 뿐이다.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변화 없이 사는 게 좋고 행복하다면 내게 그렇게 사는 비결 좀 알려다오. )
sayno@korea.com , http://cafe.daum.net/saynolove 에 2004년 4월에 기고한 글
위 글을 다른 곳에 인용하는 경우 반드시 아래 내용까지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알림:
1. 신문이나 잡지 같은 언론 매체와 위 사이트에 기고된 저의 글은 그 글이 실린 곳의 이름과 날짜, 저의 이메일 주소 sayno@korea.com 을 명시하는 한,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나, 회비를 받건 안받건 간에 회원들만 읽을 수 있는 게시판에 수록할 경우 예외 없이 모두 불허합니다. 날짜를 밝혀 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 글이 발표된 시점에서 읽어야 하는 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저의 글을 판매 목적의 도서에 인용할 경우에는 저의 동의를 별도로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3. 위 사이트는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카페이지만 제가 운영하거나 개인적으로 관련된 곳은 아니며, 제가 글을 올린다고 해서 돈을 벌게 되는 사람이 생기는 곳도 아니고, 제가 말한 바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이기에 가끔씩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
기회는 사람이 준다. 윗사람에게 잘해라.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사뮤엘 베케트(Samuel Beckett)는 기성 연극을 부정하는 프랑스 신역극의 선구자이다. 우리에게는 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 애매모호함(?)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다.
텅 빈 공간에 앙상한 나무 한 그루. 등장 인물들에게는 시간 관념이 없다. 과거도 미래도 없다. 언제나 현재다. 그곳에서 부랑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대화가 축을 이루는 이 연극에서 두 사람은 ‘고도’를 기다리면서 ‘고도’가 오지 않으면 목을 매 죽어버리자고 한다. 블라디미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에스트라공이 "만일 고도가 온다면?"하고 묻자 블라디미르는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 난해한 연극을 이해하여 보자는 것은 아니다.‘고도’가 신을 의미하는 말이건 무의미의 의미이건 뭐건 간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누구에게나 일생 동안 기회가 3번은 온다고 하지 않는가.“해와 달은 누구에게나 빛을 준다(日月無私照)”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 기회는 어디서 언제 나타나는 것일까? 혹시나 ‘고도’처럼 오는지 안 오는지 불확실한 가운데 세월만 잡아먹는 것은 아닐까.
당신이 명심하여야 할 사실은 그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며 당신 주변의 누군가에 의하여 주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돈이 그 기회를 주는 것도 아니고 학벌이 주는 것도 아니다. 기회 수여의 결정권자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보자. 학생운동가 출신인 이명박은 1965년 현대건설 경리사원으로 입사하였으나 불과 12년 만에 36살의 나이로 사장직에 올라 샐러리맨들의 우상이 되었다. 열정과 담력, 저돌성이 정주영 명예회장과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는 현대건설 회장직을 던지고 정치인이 되었다. 비록 그는 자서전에서 "오너는 결코 전문경영인을 믿지 않는다"며 "한국에서 전문경영인은 사장이 아니라 ‘사장급 직원’에 불과하다"고 꼬집었지만 그에게 기회를 준 것은 현대건설이라는 조직이 아니라 지금은 고인이 된 정주영 회장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정주영 회장이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평생 경리 업무만 보았을 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명박은 기회를 붙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렇게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누군가가 그를 눈 여겨 보다가 기회를 제시한다. 이것이 기회의 법칙이다. 왜 그럴까? 이미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바쁘다. 이미 부자가 된 사업가들 중에는 돈에 대하여 동물적 후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우리들처럼 하나 뿐이다. 혼자서는 일을 다 처리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만난 여러 나라의 성공한 사업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필요하기는 한데 믿고 일을 맡길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실업률이 제아무리 높아도 쓸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 말이 수많은 경영자들 입에서 나오지 않는가.
기회를 주고 싶은데도 기회를 받아먹을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것은 사업가들과 부자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당신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그런 사람들에 의하여 주어지며 그들은 대개 당신보다 한 세대 앞에서 기득권을 이미 획득한 사람들이다. 그 사실을 잊지 말라.
빌 게이츠가 오늘의 성공을 갖게 된 것도 마이크로 소프트의 초창기에 IBM의 어느 이사가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IBM 에서는 PC 에서 사용할 소프트웨어(disk operating system)를 찾고 있었고 이미 다른 유명한 소프트웨어 회사와 접촉한 바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IBM 의 이사가 방문하였음에도 소프트웨어 회사 사장은 건방지게도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IBM의 이사는 이름도 없는 마이크로 소프트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정장 차림으로 예의를 갖추고 기다리던” 빌 게이츠를 만났던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크고 성공적인 벤처 캐피탈 회사로 헴브리크 & 퀴스트(Hembrecht & Quist) 라는 곳이 있다. 이 회사에는 하루에도 수십통 씩 벤처 기업가들로부터 돈을 투자하여 달라는 애절한 투자 요청서가 들어온다. 하지만 그 요청서들은 대부분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투자심의를 할 때 이 회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무엇일까? 기술이나 연구비 비중, 혹은 시장 점유율일까? 아니다. 창업자 자신의 소질과 자질이다. 그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은 투자 요청서나 사업 계획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때문에 그들은 우선은 믿을만한 인맥을 통해 소개를 받은 기업가들을 우선 면접한다.
한때 주식시가 총액이 마이크로 소프트사를 능가해 관심을 모았던 인터넷 접속 장비업체 시스코 시스템스 역시 직원 중 60% 가량을 내부 핵심인력의 추천에 의해 채용한다.
이러한 여러 사례에서도 나타나듯이 당신을 기회의 신에게 소개하고 추천하는 것은 이미 이 사회에서 능력이 검증되어 돈과 지위를 획득하는데 성공한 사람들이다.
당신이 제아무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거나 그들의 생각이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있다면 당신에게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진다. 따라서 당신에게 능력이 있다면 이제는 옷차림이나 언행에 있어 주의해야 한다. 당신의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을 과연 당신보다 10년 이상 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까를 생각해 보라. 친구들에게 쓰는 말투를 그대로 나이든 사람들에게 사용하게 되면 당신은 “예의도 모르는 건방진 놈”으로 인식되게 될 뿐이다.
이것은 외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다국적기업에서 일을 했었을 때의 일이다. 미국에서 남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유학생활을 한 일본인 직원이 도쿄(東京)에 있었다. 남미인들의 영어는 일반적으로 거칠고 공손하지 않으며 길거리 소년들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 역시 비슷하였다. 나는 그가 나를 포함한 그 어느 외국인 상사들에게도 경칭이나 공손한 표현을 쓰는 것을 한번도 듣지 못했다. 약 1년후 그는 홋카이도(北海道) 지사로 좌천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성공을 원하면서도 자신의 말투나 옷차림에 대하여 인식 조차 하지 못한다. 이러한 태도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아주 극심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모든 세상 사람들을 자기 친구로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에게 e메일을 보내도 언어 사용이 친구들에게 보내는 식이다. 나에게 독자들이 보내는 메일들을 읽어 보면 채팅 언어들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젊은 친구들이 생각 없이 자기 멋대로 지껄이면서 나를 "당신"이라고 부르는 경우들도 부지기수이다. (독자가 보낸 첫번째 메일을 읽자마자 내 마음이 움직여 독자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하고 상세하게 내 의견을 말해 준 경우는 오직 딱 한 번, 롯데 그룹의 어느 직원뿐이었다. 그가 어떻게 보냈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그의 흉내를 낸 메일들이 들어올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행동은 또 어떠한가. 인사 조차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며 윗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커녕 윗사람을 자기와 동급으로 여기는 행동들이 그대로 표출된다. 명심해라. 윗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기는 커녕 예의도 모르고 건방을 떠는 사람으로 일단 비치게 되면 기회는 절대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데도 사람들은 연장자들에게 호감을 사는 사람이 되기 보다는 자기 친구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당신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당신의 친구들이 주는 것이 절대 아니다.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친구들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오직 진짜 부자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였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공동 창업자 폴 앨런이 빌 게이츠의 친구이었음을 보편화시키지는 말라. 당신의 친구가 빌 게이츠가 아닌 이상은 당신 친구가 당신에게 제공하려는 기회의 대다수는 자기가 만드는 제품을 팔아달라는 영업의 기회이거나 당신의 자금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기회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내 말을 윗사람들에게 아부를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당신 보다 나이가 든 사람들의 관점에서 당신 자신을 바라보라는 말이지 그들에게 아부하라는 뜻은 아니다. 또 우리가 흔히 사람 하나 좋다 혹은 착하다고 말하는 그 경우는 사람이 유순하다는 의미이지 능력이 있고 소질과 자질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당신의 윗사람들이 찾는 사람은 능력이 있고 태도도 좋은 사람이지 유순하고 착하며 공손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래도 윗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일가친척이 우선이라고 믿을 지 모른다. 같은 능력을 가졌다면 일가친척을 우선시할 것이다. 능력도 없는 일가친척을 우선시하는 윗사람은 당신이 던져 버려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sayno@korea.com , http://cafe.daum.net/saynolove 에 2004년 4월에 기고한 글
위 글을 다른 곳에 인용하는 경우 반드시 아래 내용까지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알림:
1. 신문이나 잡지 같은 언론 매체와 위 사이트에 기고된 저의 글은 그 글이 실린 곳의 이름과 날짜, 저의 이메일 주소 sayno@korea.com 을 명시하는 한,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나, 회비를 받건 안받건 간에 회원들만 읽을 수 있는 게시판에 수록할 경우 예외 없이 모두 불허합니다. 날짜를 밝혀 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 글이 발표된 시점에서 읽어야 하는 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저의 글을 판매 목적의 도서에 인용할 경우에는 저의 동의를 별도로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3. 위 사이트는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카페이지만 제가 운영하거나 개인적으로 관련된 곳은 아니며, 제가 글을 올린다고 해서 돈을 벌게 되는 사람이 생기는 곳도 아니고, 제가 말한 바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이기에 가끔씩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
전쟁터에서 휴머니즘을 찾지 말라
20세기 말, 소말리아에서 내전이 발생하였을 때 미 해병대가 파견되었다. 게릴라들은 주민들을 나무 십자가에 묶어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에 숨어 총을 쏴 댔다. 미 해병대는 이런 상황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뒤로 물러 나기만 했다. 그 결과 미군이 들어갔던 지역들은 모두 게릴라들이 석권하였고 그곳 주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한편 프랑스는 외인부대를 파견하였다. 외인부대는 자발적인 의사로 프랑스 정부와 계약을 맺고 군인이 된 자들이다. 그들은 과연 십자가에 주민들을 묶어놓고 그 뒤에 숨어 공격하는 게릴라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주민이고 뭐고 고려함이 없이 그냥 다 쏴 죽였다. 그리고 게릴라들은 적어도 외인부대에 대해서만큼은 자기들의 수법이 통하지 않음을 알았고 후퇴하였다. 그 결과 외인부대가 들어간 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당신이 만일 작전 사령관이라고 하자. 어느 쪽 방법을 택할 것인가. 무고한 양민들 뒤에 숨은 적군을 살해하고자 그 양민들도 쏴 죽일 것인가. 아니면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후퇴할 것인가.
대부분의 전쟁 소설과 영화 등에서 나타나는 주인공은 무고한 양민을 죽이지는 못하여, 또는 적군 조차 죽이지 못하여, 고민하고 갈등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죽고 마는 사람이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부대 전체가 입게 되는 손실은 별로 묘사되지 않는다).
1898년 독일에서 출생한 레마르크의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줄거리도 마찬가지이다.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의 태풍 속에서 공습은 계속되고 폐허만 남은 세상에서 주인공 그래비와 운명적인 여인 엘리자벳은 찰나적인 사랑에 빠진다. 눈 덮힌 러시아 전선에서 휴가를 받고 온 그에게 엘리자벳의 사랑은 존재의 이유가 될 정도로 강렬하다. 죽음의 거리에서 피어난 두 사람의 사랑은 인간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움과 동시에 무엇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의 힘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다시금 부대로 복귀한 주인공 그래비는 엘리자벳이 보낸 편지를 읽다가 자신이 살려준 빨치산에 의해 오히려 저격당해 허무하게 죽어간다.
가수 조성모의 “아시나요” 뮤직 비디오에서는 군인 한명이 정글 속에서 베트콩을 경계하지 않고 나비를 구경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실은 이것이다: 전쟁터에서 전쟁의 법칙을 무시하고 휴머니즘을 찾으면 당신이 죽는다.
100만 달러의 상금이 걸려있던 미국의 인기 TV 프로그램 '서바이버'(Survivor)에서 참가자들은 두팀으로 나뉘어 경쟁하게 된다. 각 팀은 매 단계마다 자기 팀의 참가자 중 한명을 축출해 버려야 한다. 최후의 승자는 그러한 경쟁과 축출을 통해 끝까지 남은 사람이 되게 된다. 때문에 상대팀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역할을 하게 될 팀원은 남겨두어야 하였지만 역으로 그 팀원이 나를 축출해 버리면 나는 패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아프리카 편을 보았다. 어느 한 팀에서 여자 환자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그 환자를 돌보겠다고 약속한 팀원은 환자에게 음식을 준다는 미명하에 몰래 자기도 음식을 먹었다. 훔쳐먹은 것이었다. 윤리적으로 볼 때 동료들을 속이고 나쁜 짓을 한 그 팀원이 당연히 제일 먼저 축출되어야 했다. 그러나 정작 제일 먼저 축출된 사람은 여자 환자였다. 상대팀과의 경쟁에서 환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냉정한 논리가 팀원들의 판단을 지배하였던 것이다. (매 단계마다 각 팀에서 축출된 사람은, 인간관계에만 치중한 사람과 개인적인 공로 혹은 명예만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최후에 승자가 된 사람은 동료들과의 동맹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새겨들어라!)
당신이 경쟁과 축출의 게임이 싫다면 이 게임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적군을 죽이지 못하겠다면 군대에 가지 말고 대신 감옥살이를 하면 된다. 내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경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이 게임이 요구하는 차가운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휴머니즘을 찾는다는 것이다.
세계화 물결 속에서 이득을 추구하는 경제 전쟁은 더더욱 심화되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어떤 휴머니즘 향기 그윽한 대안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경제 전쟁이라고 말을 하여도 시큰둥 하게 듣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내 눈에는 지금 사방에서 날아다니는 총탄들이 보이고 여기저기서 폭탄이 떨어져 땅이 움푹움푹 패이고 건물이 무너지는 광경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인다.
냉전 이후 더 이상 국가의 역할은 없으며 모든 사회적 문제는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데(사회적 평등과 책임을 전제하고 있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구별된다) 신자유주의는 당연히 빈부격차와 인종갈등,지역갈등을 그 어두운 그림자로 갖고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 그림자를 없애주고 살벌한 경제 전쟁을 종식시킬 앤소니 기든스의 “제3의 길” 같은 것은 과연 있는 것일까? 파이넨셜 타임즈의 컬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제3의 길을 " 유럽의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화려한 수식어"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 제 3의 길이 있건 없건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적어도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길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길이 마련되기 전에 나는, 어쩌면 당신도 , 이 세상을 떠난다.
그러니 당신이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경제 게임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에 맞추어 변화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총체적 중산층 국가로 불리던 일본마저도 그 게임의 본질을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해 중류층이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이 게임은 아주 지극히 단순하다. 이익을 누가 더 많이 낼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가, 그것 뿐이다. 그것 이외 고려하여야 할 다른 이데올로기는 없다. 지역 경제를 생각하거나, 정치적으로 특정 계층을 고려하거나, 기존 근로자들의 기득권이나 생존권에 신경을 쓰거나 하게 되면 그것은 곧 경쟁력 상실을 가져 온다.
전쟁 중에 나비가 아름답다고 해서 구경하지 말라.
전쟁 중에 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손을 내 밀지 말라.
전쟁 중에 하늘 노을이 아름답다고 해서 눈길을 보내지 말라. 그래야 총에 맞아죽지 않는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경제적으로 살아 남으려면 휴머니즘이 아니라 손익계산서에서 이득이 나와야 한다. 도대체 왜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행동하여야 하느냐고? 그래야만 경제 게임에서 이길 수 있고 자본이라고 하는 힘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힘을 지니지 못한 자는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다”(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외교관인 장 지로두가 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이 휴머니스트라면 경제 게임을 하지 않으면 된다. 축구팀에 농구 선수가 들어와서는 왜 손을 사용하지 않느냐고 징징대지 말고 돈 벌지 말라는 말이다.
sayno@korea.com , http://cafe.daum.net/saynolove 에 2004년 3월에 기고한 글
위 글을 다른 곳에 인용하는 경우 반드시 아래 내용까지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알림:
1. 신문이나 잡지 같은 언론 매체와 위 사이트에 기고된 저의 글은 그 글이 실린 곳의 이름과 날짜, 저의 이메일 주소 sayno@korea.com 을 명시하는 한,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나, 회비를 받건 안받건 간에 회원들만 읽을 수 있는 게시판에 수록할 경우 예외 없이 모두 불허합니다. 날짜를 밝혀 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 글이 발표된 시점에서 읽어야 하는 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저의 글을 판매 목적의 도서에 인용할 경우에는 저의 동의를 별도로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3. 위 사이트는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카페이지만 제가 운영하거나 개인적으로 관련된 곳은 아니며, 제가 글을 올린다고 해서 돈을 벌게 되는 사람이 생기는 곳도 아니고, 제가 말한 바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이기에 가끔씩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
운명적 사랑을 믿지 말아라.
혹시 우연히 만난 생면부지의 이성에게서 가슴이 갑자기 아릴 정도로 시려지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고 난 뒤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아니 가슴이 내려 앉는 듯한 그런 느낌 말이다. 그런 느낌을 받았을 때 나는 이 세상 살기가 만만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젠장. 단 하룻밤만이라도 함께 지낼 수 있다면 모든 걸 포기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대상.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흔들리고 마는 영혼. 이른 바 휠(feel)이 꽂히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 내가 뭘 알겠냐 만은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같으며 운명적 만남으로 찬미하는 것 같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 Eyes Wide Shut 에서 그러한 감정은 현실을 위협하는 위험한 욕망으로 표현된다. 성공한 의사 빌 하퍼드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앨리스는 친구가 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한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이성으로부터 강한 성적 유혹을 받는다. 다음날 앨리스는 빌에게 숨겨왔던 비밀을 고백한다. 여름 휴가 때 우연히 한 해군장교와 마주쳤는데 그에게 너무나도 강한 성적 충동을 느껴 그와 하루 밤만 보낼 수 있다면 남편과 딸 모두를 포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고 말이다.
영화는 우리의 두근거리는 마음 뒤편에 은밀히 숨어 있는 것이 성적 욕구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을 우리는 본능이라고 부른다. 성욕을 일으키는 유전적 DNA 가 우리에게 본능으로 있다는 말이다. 그 DNA의 역할은 종족 보존을 위한 교미 충동을 일으키는 것이며 이 유전자로 인하여 수컷은 자기의 씨를 수많은 암컷에게 뿌리려고 하고 암컷은 우성 인자를 받으려는 목적에서 더 나은 수컷을 선택하게 된다.
고귀한 사랑의 감정을 프로이드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성적 본능으로만 조명할 수 있느냐고? 당신이 아무리 플라토닉 러브의 신봉자라고 할지라도 어떤 이성을 좋아한다면 그 사실 자체가 이미 성적 본능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는 것이 실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성적 DNA가 가져온 은밀한 충동이다. 이른 바 전기가 흐르는 듯한 짜릿한 운명적 만남이라는 것이 사실은 종족 보존 DNA가 요구하는 최적의 교미 상대를 만났을 뿐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무대 위에 오르게 되면 우리의 행동과 마음을 그렇게 성적 유전자가 지배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말라. 이것은 2000년 2월 미국 코넬대 인간행동연구소의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2년간 남녀 5000명을 조사한 결과에 의하여서도 입증된다. 연구팀은 가슴 뛰는 사랑은 18~30개월이면 사라지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사랑의 감정은 뇌의 화학작용”이며 “남녀가 만나 2년 정도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더 이상 사랑의 화학물질이 생성되지 않는다”.
미시간대 로버트 프라이어 교수 역시 비슷한 주장을 하는데, 사랑에 빠지면 분비되는 세로토닌 등은 상대의 결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해 사람을 눈멀게 만들지만 유효기간은 2년 정도라고 했다. 성적 호기심이 일단 채워지면 더 이상 화학 물질이 처음처럼 분비되지 않으며 연인에 대한 뜨거운 감정이 실은 유전자가 분비 시킨 화학물질이 가져온 결과라는 말이다.
본능에 의해 지배되어 시작되는 사랑은 그 원시적 속성으로 인하여 우선은 외모 같은 육체적 조건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첫눈에 반하거나 첫인상이 좋아서 호감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첫 단추 하나로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본능에 의하여 그렇게 지배된 사랑은 그 원시적 속성으로 인하여 결코 오래 갈 수가 없다.
칠순이 다 된 영원한 은막의 여왕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8번의 결혼과 17번에 걸친 연애행각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매번 결혼을 할 때마다 “이제야 내 진정한 사랑을 찾았어요”라고 말하곤 했지만 그 사랑은 모두 깨져 버렸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본능에 의해 지배된 만남을 진정한 사랑으로 믿었기 때문 아닐까?
수많은 나라들에서 신혼 부부 3쌍 중 한 쌍 이상이 이혼을 하는 이유도 본능에 의해 치장된 감정을 진정한 사랑으로 오해하고 결혼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부부들이라 할지라도 상당수는 이미 마음이 식어버린 채 살아 간다. 국정홍보처가 전국 20세 이상 남녀 4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인의 의식,가치관 설문조사’결과에 따르면 ‘다시 태어나면 현 배우자와 결혼할 의향이 없다’고 응답한 사람이 47.8%나 됐다. 두 쌍 중 한 쌍은 이미 깨져 있다는 말이다.
어느 부부는 남자가 여자를 만난 순간부터 너 아니면 못산다고 농약까지 마시며 자살 소동까지 벌이면서 결혼하였다. 헌데 1년도 안가서 남편은 폭력을 휘두르고 다른 여자와 살림까지 차렸다. 이런 경우가 어디 하나 둘인가.
이혼 경력이 있는 기혼자였던 미국인 심슨 부인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두근거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은 그녀와 결혼하고자 영국 왕위를 내 놓았던 에드워드 8세의 경우는 어떠할까? 당시 그는 왕위에 오른지 1년도 채 안된 시점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렇게 고백하였다.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무거운 책임을 이행해 나가기가 나로서는 불가능함을 깨달았다.”(I have found it impossible to carry the heavy burden of responsibility… without the help and support of the woman I love.) 그날 밤 에드워드는 호주로 건너가 몇 개월을 있으면서 심슨 부인이 이혼 수속을 마칠 때 까지 기다렸고 드디어 프랑스에서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려 온 이 사랑 이야기는 아마도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꿈꾸는 러브 스토리일 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들은 나중에 어떻게 살았을까? 그 두 사람은 “성격차이로 인하여” 별거하였다. 새겨들어라. 성격차이라는 말은 갖가지 이유들로 인해 대단히 많이 싸웠다는 것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외교적 언어라는 것을.
기억하라. “왕자와 공주는 만나자 마자 서로를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였고 행복하게 평생을 같이 보냈대요.”라는 식의 동화들은 적어도 절반은 거짓이므로 만나자마자 운명적으로 빠져버리는 사랑은 기대하지도 말고 믿지도 말아라. 운명적 만남의 두근거림은 사랑이 아니라 본능적 DNA 가 화학물질을 분비 시켜 당신도 모르게 나타나는 원시적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과의 만남에서 누구나 외모 혹은 첫인상에 호감을 느껴야 관계를 열어갈 수 있지만 그것이 지속시켜주는 사랑의 시간은 길지 않다. 순간적으로 불 붙기 시작한 뜨거운 사랑이 끝까지 지속되는 예는 대부분 그 사랑이 시작 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에 영화 타니타닉에서처럼 죽음이나 사회적 굴레로 인하여 헤어져야 하는 경우에서 주로 나타난다. 즉 사랑의 시간이 지극히 한정되어 있는 경우에 발생하는 것이지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되면서 성적 본능이 이미 충족된 상태가 되면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진정한 인간의 사랑은 육체적 조건에 집착하는 유전적 본능의 지배에서 한 단계 뛰어 넘는다. 그 사랑은 상대방의 인격, 개성, 취미, 습관, 지성, 능력, 가치관 등등의 내면 세계에 매력을 느껴야 유지될 수 있다. 시작은 육체적 매력에 사로잡혀 시작되어도 내면의 뒷받침이 없다면 곧 사라질 거품이 된다. 때문에 사랑의 순서를 말한다면 이성(reason)의 교류부터 시작되고 그것이 감성으로, 다시 감성이 감정으로, 그리고 그 감정이 본능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결론: 남자는 자신이 어떤 여자를 만지고 싶고 애무하고 싶고 그 여자와 섹스하고 싶다고 해서 그 여자를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섣불리 착각하지 말 것. 여자는 남자와 섹스를 할 때 느끼는 포근함이나 따스함 등등을 자신이 그 남자를 사랑하는 증거로 100% 과신하지 말 것. 남자 여자 모두, 육체적으로 상대에게 길들여져 있고 벗은 몸의 친밀도가 크다고 해서 두 사람의 사랑이 계속 지속될 것으로 오판하지는 말 것. 만날 때 마다 스킨쉽 혹은 섹스에 탐닉하는 관계라면 당장 그만 둘 것. 가장 중요한 것: 외롭다고 사람을 사귀지는 말 것.
sayno@korea.com , http://cafe.daum.net/saynolove 에 2004년 3월에 기고한 글
위 글을 다른 곳에 인용하는 경우 반드시 아래 내용까지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알림:
1. 신문이나 잡지 같은 언론 매체와 위 사이트에 기고된 저의 글은 그 글이 실린 곳의 이름과 날짜, 저의 이메일 주소 sayno@korea.com 을 명시하는 한,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나, 회비를 받건 안받건 간에 회원들만 읽을 수 있는 게시판에 수록할 경우 예외 없이 모두 불허합니다. 날짜를 밝혀 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 글이 발표된 시점에서 읽어야 하는 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저의 글을 판매 목적의 도서에 인용할 경우에는 저의 동의를 별도로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3. 위 사이트는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카페이지만 제가 운영하거나 개인적으로 관련된 곳은 아니며, 제가 글을 올린다고 해서 돈을 벌게 되는 사람이 생기는 곳도 아니고, 제가 말한 바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이기에 가끔씩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
개새끼들에게는 욕을 하자.
[ 경고 : 이 글에는 지독한 쌍욕들이 나온다. 쌍욕에 대하여 앨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자는 이 글을 절대 읽지 말 것. - 이렇게 말하면 꼭 더 읽는다.]
많은 독자들이 쇼크를 먹을지 모르겠다만 , 종종 나는 욕하는 것을 즐긴다. 욕하는 법을 연구하기도 했고 새로운 욕을 만들어 외우기도 했다. 물론 내가 언제나 입에 욕을 달고 사는 사람은 아니다. 겉보기에도 나는 전혀 욕이라고는 입에 담지도 않을 사람 같은 인상이라고 한다(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나는 상대가 여자이건 남자이건 노인이건 젊은이 이건 간에 “행동이 개떡 같다면” (그가 먹고 살기 바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한) 쌍욕을 한다.
아니, 점잖은 체면에 좋은 말로 조용히 잘못을 지적해야지 몰상식하게 쌍욕이냐고?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너그럽게 이해 혹은 용납하여 줄 것으로 믿고 있을 뿐 아니라 전혀 쌍욕을 얻어 먹은 적이 없기 때문에 좋은 말로 해서는 행동의 변화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점잖게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고 왜 쌍욕을 하느냐고? 좋다. 길게 대기자들이 줄을 서 있는데 중간에 새치기하는 18 년/새끼에게 당신이 한번 좋은 말로 타일러 보아라. 그리고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 살펴보아라. 백이면 백, “별 미친 놈이 지랄이야”라는 표정으로 당신을 쳐다보거나 아니면 “당신이 무슨 참견이냐” 고 대꾸할 것이다.
자, 이제 당신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공중도덕을 지키셔야죠” 라고 말할 것인가? “점잖은 분이 새치기하면 되나요”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줄을 서서 순서를 지키고 있으니 맨 뒤로 가세요”라고 말할 것인가? “질서는 편하고 아름다운 것이니 우리 다같이 질서를 지킵시다” 라고 말할 것인가?
당신의 그 공손한 말에 그 18년/놈이 맨 뒤로 갈 가능성이 도대체 몇 퍼센트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내 경험으로 볼 때 0 % 이다. 그 18년/놈은 여전히 뻔뻔스럽게 그 자리에서 버틸 것이며 당신 말을 “똥개야 짖어라”는 식으로 취급할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내 앞에서 새치기 하는 년/새끼에게 점잖게 말을 했다가 “너나 잘 지켜라, 네가 무슨 참견이냐”라는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분통을 터뜨리다가 나중에 잠자리에서 분해서 씩씩대며 잠을 이루지 못한 경험이 몇 번 있었다. 당신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경험은 아주 아주 불쾌한 것이기에 “10분간 고민한 뒤” 나는 상당히 공격적인 어조로 현장에서 쌍욕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상대가 누구건 간에 첫마디부터 미리 외워 둔 욕으로 도배를 하였다.
이를테면 “야 앞에서 새치기하는 18새끼/놈아. 여기가 네 에미 보지구멍이냐. 아무데나 슬그머니 좃대가리 쳐박게”, “뭘 째려 봐, 18년/새끼야, 이 줄이 아무 좃이나 들락거리는 네 에미 보지 구멍인 줄 아냐? 당장 뒤로 돌아가, 좃 같은 새끼/년아”, ”너, 귀에 좃물이 부어져 안 들리십니까? 내가 하는 말씀이 네 번데기 자지 같습니까?” 등등이다. 물론 상대방은 당연히 나를 인간 말종으로 알고 나와 시비 붙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그 자리에서 불쾌감이 해소될 뿐만 아니라 즐거움 마저 생겼는데 그 즐거움은 상대방의 기분을 얼마나 잡치게 만들었느냐는 확신과 비례하였다(하지만 나는 새디스트는 아니다).
어쨋든, 반말을 찍찍하는 버릇을 가진 젊은 의사를 만났을 때는 환자들이 많은데도 그 자리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로 쌍욕을 하기도 했고, KBS 방송국 기자 명함을 운전석 앞에 놓아 두고 자기 멋대로 주차 시키고 가서는 가족들과 식사 중이던 놈에게는 그 가족들 모두에게 완전 기분이 똥이 될 정도로 욕을 한 바가지 선사했다. 기사가 딸린 검정색 고급승용차가 깜빡이도 켜지 않고 갑자기 끼어들기를 할 때는 그 뒷좌석에 앉아 있는 놈에게 가끔 시비를 거는데 “야 이 좃 같은 18새꺄, 기사 새끼 데리고 다니려면 운전 교육부터 똑 바로 시켜 쳐먹어, 여기가 새치기해도 되는 네 에미 보지 구멍인줄 아냐? 18새끼”라고 해야 속이 시원하다.
한번은 여의도에서 그 뒷좌석에 있는 놈이 얼굴이 시뻘개진 채 자기가 국회의원이라고 하면서 명예훼손 어쩌구 개소리를 하길래 “같이서 경찰서 가자. 누가 개망신을 당하게 되는지 내가 똑바로 알게 해주마” 라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기도 했다(나는 길거리에서 나처럼 돈 있다고 깝죽대거나 권력이 있다고 깝죽대는 그런 새끼들을 골탕먹이는 게 매우 재미있다).
공공 장소에서 애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돌아다니는 데도 그 부모가 내버려 둘 경우 나는 처음에는 아주 듣기 좋은 점잖은 말로 이야기 하지만 그 부모가 웬 참견이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면 즉시“저기 번데기 좃만한 새끼들이 니 보지 구멍에 니 자지가 들어가 빠져 나온 18새끼들이십니까?”라고 말함으로써 그 부모의 기분을 확 잡쳐 버려 놓아야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깡패들에게 대들다가 얻어 맞은 적도 네 번 있는데 한번은 마흔 중반이 넘어서도 그런 적이 있다. 나 쪽 팔리고 나 손해라고? 나는 나 보다 강하게 보이는 놈들에게 할 말도 못하는 것 보다는 얻어 맞더라도 덤비는 게 더 좋다. 아프기 밖에 더 하겠는가(참고 : 진짜 깡패들은 절대 당신 얼굴을 때리지 않는다. 내가 맞아 봐서 안다.ㅋㅋ). 그런데 당신 정말 지하철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야간 열차에서 고성방가하는 녀석들에게 침묵하는 이유가,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고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라고? 정말?
어쨌든 내가 사용하는 욕들은 그 목적이 듣는 사람의 혈압을 크게 끌어 올리고 기분을 잡치게 만드는 데 있으므로 보지,좃,자지,10,18같은 단어들이 의도적으로 빈번히 사용되며 절대 평범한 욕이 아니다.( 욕하는 법도 배워야 잘할 수 있는 엄연한 기술이지만 내가 사용하는 욕을 모두 여기서 가르쳐주게 되면 도서출판 윤리위원회 같은 곳에서 뭐라고 그럴 것 같으므로 스스로 알아서 배워라. 시중에 김열규 라는 사람이 욕에 대해 연구하여 쓴 <욕>이라는 책도 있다.)
욕을 더럽게 하면, 일단은 쌍놈 내지는 못 배운 놈, 인격 파탄자, 불량배 등으로 간주된다. 다행히도(?) 나는 독자들이건 누구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므로 체면 손상 같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하지만 딸들과 함께 외출한 경우에는 딸들 입장을 생각해서 눈꼴 사나운 모습을 보아도 여간해서는 시비를 걸지 않는다(어느 호텔 한식당에서 딸들이 보기에도 눈꼴 사나운 놈들이어서 딸들이 내게 시비를 걸라고 말한 경우도 있었는데 모 정당 당무위원이라는 10새끼들이었다 ).
좌우지간 나는 ‘욕하기 운동 국민본부’ 같은 것이 생겨나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공중도덕을 모르는 18새끼들과 18년들에게 너무나도 관대한 것이 우리 사회이고, 모르는 사람의 잘못을 면전에서 지적하는 것을 꺼려하다 보니(당신도 아마 침묵을 지키며 “참는 게 최고”라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결국 못된 18 년, 18새끼들은 계속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그 결과 이 사회는 개판이 되어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교통 질서만을 예로 들어 보자. 길게 늘어선 진입 차선 앞에서, 버스나 택시나 화물차도 아닌데, 끼어들기 하는 차량에 양보하여 주는 선량한 운전자들이 나는 싫다. 왜 그 얌체들에게 욕을 하지 않는가. 왜 새치기 하는 사람들에게 관대함과 너그러움을 보이는가. 왜 경적 조차 울리지 않는가. 왜 차량통행이 빈번한 2차선에서 한 차선을 막은 채 뻔뻔스럽게 비상등을 켠 채로 주차하여 있거나 인도까지 올라와 있는 자가용 차량 운전자들에게 “야 이 10새꺄”라고 말하지 못하는가(대부분의 운전자들은 경적 조차 울리지 않는다. 그런 18년, 18놈들을 보면 경적을 울려라!). 기사에게 불법 주차 상태로 대기하도록 지시한 사장 새끼들과 여러 종류의 10새끼들이 차 뒷좌석에 탈 때 왜 욕을 퍼붓지 못하는가. 보행자 파란불이 켜졌는데도 차를 횡단보도로 진행시키는 개새끼들과 개잡년들에게 왜 아무도 욕을 안 하는가. 그러니 그 새끼들과 그 잡년들이 더더욱 다른 사람들을 우습게 보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누군가가 그런 잡 10새끼, 18년들에게 욕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을 거들어 주면서 다같이 욕하자.
욕을 할 때는 상대방의 나이를 고려하지 말아라. 나이를 웬만큼 쳐먹은 한국의 꼰대들은(나도 꼰대다) 학력, 학벌, 지위에 전혀 상관 없이, 잘못은 자기가 해 놓고도 오히려 상대방의 말투나 나이 같은 것으로 꼬투리를 잡아 따지고 드는데 아주 익숙하고, 이러한 경우 주변 사람들 역시 나이든 사람의 잘못 보다는 그 잘못에 대해 항의하는 젊은 사람을 무조건 탓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연장자들은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경향을 다분히 보이는데 이게 다 쌍욕을 쳐먹지 않아서 그렇다(노인공경? 공경할 만한 사람만 골라서 공경하라). 나이가 젊은 사람들도 뭐 크게 다를 바는 없지만 말이다.
욕을 하다가 한 대 맞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주먹으로 한 대 맞고 엄살을 좀 부린다면 최하 몇 주 이상의 상해 진단이 나올 것이다. 이빨이 부러졌다면 6주 이상의 진단이 나온다. 한번은 나 대신 내 기사( 나에게 건축 인테리어를 배워 후에 독립하였다)가 뺨을 한대 맞았던 적이 있는데 2주 진단이 나왔고 게다가 일몰 이후였다. 2001년 까지는 일몰시간 이후에 맞았다면 가해자는 무조건 100% 형사처벌 되었다. 지금은 조금 완화되었지만 여전히 상대방이 2인 이상일 경우 또는 일몰 시간 이후에 맞았다면 당신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 이상 상대방은 반드시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전과자가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일몰 시간은 기상청 발표 일몰시간이기에 날이 어두워진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님도 알아 두어라. 여름에는 날이 훤한데도 일몰 이후인 시간이 많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당신이 왼뺨을 맞고도 오른 뺨을 무상으로 내주는 예수가 아니라면 상해진단서를 발부 받아 경찰에 고소하면 된다. (상해진단서의 진단기일을 생각보다 길게 잡아주는 대단히 고마운 의사들도 있다). 경찰이나 검찰에서 합의를 종용하여도 상대방이 많은 합의금을 제시하지 않는 한 응하지 말아라. 처벌을 원한다고 해라. 상대방이 유일하게 빨리 구속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수백만원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수천만원의 위자료를 당신에게 주고 합의서를 받아야 한다. 최후의 승자는 결국 당신이 된다는 말이다.( 명심해라. 아무리 분통이 터지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절대 폭력을 행사하지 마라. 현명한 자는 때리기 보다는 상대의 신원을 파악한 뒤 상대가 주먹을 날릴 때 오히려 얼굴을 더 가깝게 대 준다. 그래야 진단 기간이 길게 나오기 때문이다. 단, 차량 번호 같이 상대방의 신원을 추적할 수 있는 정보가 있는 경우에 한한다. 당신이 폭력을 행사하여도 좋은 경우는 어느 때일까? 이걸 말하자니 무슨 폭력교사를 하는 것 같아 좀 켕긴다. 이 글을 자세히 읽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욕을 할 때도 원칙이 있다. 첫째, 신변을 위협하는 말은 하지 말아라. “네 목아지를 따 버리겠다느니 네 배때기에 사시미 칼이 안들어가는 줄 아느냐”는 식의 조폭식 화법은 절대로 사용하지 말아라. 폭행죄에 해당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이 그런 욕은 “들어 보기는 커녕 알지도 못하고 한 적도 없으며 할 수도 없다”고 정치인들처럼 딱 잡아 뗀다면, 그리고 증인도 없다면, 증거불충분이 되겠지만 말이다. 둘째, 먹고 살기 바빠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시비를 걸지 말아라. 길거리에서 택시나 화물차, 버스를 상대로 잘잘못을 따지지는 말라는 말이다. 양보와 용서는 사정이 조금이라도 나은 자가 베풀 줄 알아야 하는 덕목이다. 그러나 돈 있고 권력 있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놈들(년들도 무지 많다)과 중산층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시비를 걸고 욕을 선사하라. 셋째, 절대 흥분하지 말아라. 욕은 얼음처럼 차가운 마음으로 머리로 하여야 최대 효과를 거둔다. 그래야 싸늘한 맛도 생긴다. 넷째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상대방의 재산은 절대 훼손시키지 말아라. 그것이 사소한 물건이라도 당신은 형법상 죄인이 되고 만다. 다섯째, 욕을 용두사미식으로 하면 절대 안 된다. 용두용미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욕 레파토리를 만들어 놓고 달달 외워라. 그리고 반드시 상대방의 잘못과 연관지어 욕을 하여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유리하다. 여섯째, 욕을 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리게 할 것인지 아니면 상대방에게만 들리도록 할 것인지를 정확히 판단하라. 이것은 법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이므로 되새김질 하여 들어라. 끝으로 당신부터 제대로 해라. 당신부터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들을 거리낌 없이 한다면 욕은 당신이 먼저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추신: 1.젊은 친구들은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의 잘못을 탓할 때 우습게 여기고 섣불리 엉기지 말아라.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밖에 말하지 못하는 꼰대들도 있지만 법을 철저히 이용해 적어도 몇 개월은 구치소에 쳐넣을 수도 있는 꼰대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젊은 사람을 훈육하려는 나이 든 사람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언사를 하면 콩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법원 판례들이다. 2. 보통의 개새끼, 개년들은 욕을 먹게 되면 하나 같이 “당신이 나를 언제 봤다고 욕을 하는거야”라는 말로 대항하는데 그 말을 듣는 즉시 퍼부을 수 있는 욕을 생각해 두어라. 3. 내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당신 생각에 욕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믿는다면 계속 그렇게 착하게 인내하며 좋은 말만 쓰면서 살아라. 속으로 분통 터트리는 성격만 아니라면 말이다. 진심이다. 나는 단지 신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예의 바른 신사가 되지만, 쌍놈,쌍년에게는 내가 신사적으로 대하여도 아무 변화가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 보다 더한 쌍놈이 되는 이중적인 면을 갖고 있을 뿐이다. )
sayno@korea.com , http://cafe.daum.net/saynolove 에 2004년 3월에 기고한 글
위 글을 다른 곳에 인용하는 경우 반드시 아래 내용까지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알림:
1. 신문이나 잡지 같은 언론 매체와 위 사이트에 기고된 저의 글은 그 글이 실린 곳의 이름과 날짜, 저의 이메일 주소 sayno@korea.com 을 명시하는 한,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나, 회비를 받건 안받건 간에 회원들만 읽을 수 있는 게시판에 수록할 경우 예외 없이 모두 불허합니다. 날짜를 밝혀 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 글이 발표된 시점에서 읽어야 하는 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저의 글을 판매 목적의 도서에 인용할 경우에는 저의 동의를 별도로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3. 위 사이트는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카페이지만 제가 운영하거나 개인적으로 관련된 곳은 아니며, 제가 글을 올린다고 해서 돈을 벌게 되는 사람이 생기는 곳도 아니고, 제가 말한 바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이기에 가끔씩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
부자들에게는 과소비가 없다
부자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암초는 수입의 상당 부분을 과소비하는 생활 태도이다. 흔히 과소비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부유층의 과소비, 중산층의 모방소비, 하류층의 자포자기식 실망 소비가 그것이다.
하지만 과소비가 능력 이상의 소비를 의미하는 이상, 부유층의 과소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소비는 부자들이 하는 게 아니다. 부자도 아니면서 졸부들을 따라 하는 사람들이 분수 이상으로 소비하는 것이 과소비이다. 나는 한번도 부자들이 수입보다 더 많은 지출을 하여 카드 빚에 시달린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능력에 따라 소비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때로는 능력에 맞지 않게 소비하였지만 과소비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에 평소에 먹고 입는 것에서 거의 거지 수준으로 살면서 엄청나게 절약하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을 나는 과소비를 한 사람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멋지게 사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술 담배를 모두 끊고 그 돈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에 몰두 하거나 이웃 사랑에 사용하는 사람 역시 삶을 지혜롭게 살 줄 아는 사람 아니겠는가.
내가 과소비라고 단정하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입고 걸치고 마시고 먹고 놀고 타는 데 있어서 갖가지 그럴 듯 한 핑계를 대며 이루어지는 중산층의 모방 소비와 하류층의 실망 소비이다. 능력도 없는데 부자들의 소비를 흉내낸다.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그러한 소비가 부자들을 더욱더 부자로 만들어 준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소비하는 것들의 대다수가 실은 부자들이 만들어 놓은 사업체들에서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차재호 서울대 사회심리학 교수는 심리학적으로 과소비 성향은 권력욕구에서 나온다고 하면서, 분수에 맞지 않게 과소비를 하는 것은 자신이 힘을 가졌다는 짜릿한 맛을 즐기기 위함이고 희귀한 물건을 사 모으는 것은 권력욕구의 본질이 남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려는 데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많은 수의 신용 카드를 소유하는 경향 역시 그것을 뽐낼 일로 생각할 뿐 아니라 그 카드로 호기 있게 돈을 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소비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은 애리조나 대학 경영대학원의 애릭 린드플레이시 박사팀이 1997년 발표한 논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논문은 “부모가 이혼한 가정의 젊은이들은 물질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충동구매를 하는 경향이 있음”을 밝힌다. 소비벽이 심한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물건이나 돈이 아니라 진실되고 따뜻한 인간관계라는 말이다.
버는 족족 돈을 쓰느라고 통장에 돈이 쌓이지 않는다고? 카드 빚만 계속 쌓인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진실된 인간관계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남들 앞에서 우쭐거리고 싶어하는 허세만 강한 정신적 미숙아일 수도 있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소비가 과소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여주는 기준은 오직 하나이다. 자기 계발을 위한 지출이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기분 내느라고 사용했는가? 라이프 스타일 유지? 문화 생활을 하고자? 휴가를 즐기고자? 나는 그 모든 것들을 과소비로 몰아 부친다(명심해라.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한한다”는 조건이 있다).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고? 특별한 천재적 재능도 없는 나 같은 보통 사람이 부자가 되려면 일단은 최우선적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할 것 아닌가. 쓸 것 다 쓰고 즐길 것 다 즐기고 무슨 돈으로 뭘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겠다는 말인가.
지금 당신의 서랍과 장롱 속에 뭐가 있는지 잠시 생각해보라. 그리고 직접 확인해 보라. 평상시에는 기억 조차 나지 않는 것들을 당신이 상당히 많이 갖고 있음을 알 것이다. 그것들을 살 때는 갖고 싶어서 샀을 텐데 왜 지금은 기억 조차 나지 않는 것일까? 없어도 될 것들을 구입하였기 때문 아닐까?
없어도 되는 것을 구입하는 그 헛된 행동에서 벗어나려면 제일 먼저 신용카드를 없애 버려라. 당신에게 꿈을 주고 당신을 세상에서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카드? 당신에게 겁을 주고 삶을 텅 비게 만드는 카드만 있을 뿐이다. 언제나 앞서가는 카드? 빚에 있어서 앞서 갈 것이다. 당신에게 돈을 되돌려 주는 카드? 원숭이 같이 조삼모사를 기뻐하지 말라. “여러분 부자 되세요?” 당신이 카드를 많이 쓸 때 부자가 되는 것은 그 카드 회사이고 그 회사 직원들이지 당신이 절대 아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sis Fukuyama)는 '역사의 종말'(원제는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이다)에서 이제 역사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끝으로 더 이상 진보할 수 없는 완성된 상태에 도달했다고 까지 했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가 지향하는 누구나 다 평등한 사회는 니체가 말하는 노예의 사회나 다름없는 문제를 안고 있으며 평등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은 역으로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 반항하는 위험 요소를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잘사는 사회를 꿈꾸지 말아라. 그리고 명심해라. 시장경제에 대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당신이 돈을 어디에 사용하고 어떻게 모으는가 하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신중하게 자기 삶을 꾸려 나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잣대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sayno@korea.com , http://cafe.daum.net/saynolove 에 2004년 3월에 기고한 글
위 글을 다른 곳에 인용하는 경우 반드시 아래 내용까지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알림:
1. 신문이나 잡지 같은 언론 매체와 위 사이트에 기고된 저의 글은 그 글이 실린 곳의 이름과 날짜, 저의 이메일 주소 sayno@korea.com 을 명시하는 한,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나, 회비를 받건 안받건 간에 회원들만 읽을 수 있는 게시판에 수록할 경우 예외 없이 모두 불허합니다. 날짜를 밝혀 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 글이 발표된 시점에서 읽어야 하는 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저의 글을 판매 목적의 도서에 인용할 경우에는 저의 동의를 별도로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3. 위 사이트는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카페이지만 제가 운영하거나 개인적으로 관련된 곳은 아니며, 제가 글을 올린다고 해서 돈을 벌게 되는 사람이 생기는 곳도 아니고, 제가 말한 바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이기에 가끔씩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
부자는 불행한 도둑놈이 아니다
사람들이 부자에 대하여 갖고 있는 편견 중 대표적인 것 하나는 부자는 불행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손대는 것 모두가 황금으로 변하여 음식 조차 먹지 못했던 미다스의 불행을 즐겨 인용한다. 많은 돈이 가져올 수도 있는 불행을 과장되게 극대화 시키는 것을 사람들은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그 사람은 부자이기는 하지만 …” 이라는 말 뒤에는 언제나 나쁜 내용들만 도사리고 있다. 예컨대 “ 부부간에 사이가 좋지 않대, 자식이 공부를 못한대, 애인이 따로 있대, 성격이 괴팍하대, 당뇨에 고혈압이래, 탈세를 하였대, 위화감을 조장하여 국민 단합을 저해하고 있어…” 하지만 이런 것들은 부자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 사람은 부자인데다가 가족 모두 행복하게 잘살고 있대” 라는 식의 표현은 여간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병원에서 중환자가 일반 택시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지…불쌍해라"고 생각하지만 최고급 승용차에서 운전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내리는 중환자를 보면 "돈이 있으면 뭐해. 건강이 최고야"라고 생각한다. 돈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마도 속으로는 “졸부구나”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할 것이다.
언젠가 어느 유명인이 자기 승용차 안에서 여자를 강간한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 언론 매체들은 그가 “자신의 승용차 안에서 그랬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방송,신문,라디오 매체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신의 벤츠 승용차안에서 그랬다”고 말하였다. 왜 “벤츠”라는 것을 친절히 알려주는 것일까? 부자들에 대한 시기와 함께 “있는 놈들은 원래 이래” 라는 식의 편견이 기자들 마음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땡볕 속에 땀 흘리며 일을 마친 후에 시원한 막걸리를 한잔 하면서 시시콜콜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고 두 다리 쭉 뻗고 단잠을 자는 사람이 첨단 보안 장치 속에서 안전을 구걸하는 부자, 내일의 주가, 내일의 환율, 내일의 사업을 걱정하며 잠드는 부자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부자에 대하여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다고 그렇게 단정한단 말인가. 부자로 살아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부자에게는 시시콜콜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없으며 부자는 두 다리 쭉 뻗고 단잠을 자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왜 부자가 안전을 구걸한다고 믿으며 왜 부자가 주가,환율,사업 걱정 때문에 잠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진짜 부자들은 경비 시스템이 철저한 곳에서 살고 있기에 안전이 보장되어 있고 주가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사람들은 부자가 아니라 대박환상에 빠진 개미 투자자들이며 환율이나 사업 걱정을 하는 정도라면 재산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런 글을 읽은 적도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많아 질수록 인간관계에서 특히 가족간의 정은 더 메말라 가고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여 가치를 비교하는 습관이 생겨 삶이 더 척박해 진다." 왜 사람들은 부자의 가족들은 정이 메말라 있다고 생각할까? 왜 부자의 가족들이 다 같이 연주회장 특석에 앉아 공연을 즐기는 모습이나 해외의 리조트 호텔에서 여유롭게 가족 휴가를 보내는 모습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연속극 드라마 작가나 소설가, 시인, 기자, 방송작가 등이 부자도 아닌데 왜 그들이 추측하여 그려내는 모습들을 부자 가족의 삶으로 믿는 것일까?
왜 부자의 인간관계는 척박하다고 믿는 것일까? 돈을 아귀처럼 움켜쥐고 있으면서 만원 짜리 한 장에 바들바들 떠는 부자도 있고 있는 놈이 더하다는 말도 있고 아흔 아홉 가마 가진 놈이 한 가마 더 채우려고 혈안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듯이 넉넉하고 너그러운 부자들도 있음을 왜 인정하려 하지 않을까?
물론 부자들이, 많은 것을 돈으로 계산하는 습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왜 그럴까?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에서일까?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경제의 속성부터 배워야 한다. 내가 묻는다. "경제를 배우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돈을 더 벌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선택을 현명하게 하기 위함이다. 같은 재화를 갖고서 얻을 수 있는 가치들을 비교 선택하여 불필요한 낭비를 없애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당연히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가치 비교가 있어야 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를 고르기 위해 따져 봐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느 해 겨울, 나는 가죽 쟈켓을 사고 싶었다. 백화점에 가 보니 세일 가격 조차 백만원이 넘었다. 양가죽이 제 아무리 좋아도 양가죽이고 바느질과 안감이 제 아무리 좋아도 백만원이 넘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결국 상표값이라는 말인데 전혀 내키지 않았다. 가족들과 명동 밀리오레에 갔을 때 물어 보니 비슷한 품질이 오십만원대. 그래도 나는 사지 않았다. 1월경 홈쇼핑 잡지에서 나온 이태리산 양가죽 쟈켓은 25만원대. 납품가는 20만원미만으로 추정되었다. 2월경 가죽옷이 들어 갈 시기, 남대문 메사에서 나는 15만원에 아주 마음에 드는 무광택 양가죽 쟈켓을 하나 샀다. ( 홍콩에서 스포티한 디자인의 가죽 쟈켓을 60만원 주고 구입한 적도 있다.)
부자들은 종종 물품 값을 지불할 때 "당신이 보기에는 야박하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물품이나 서비스에 대하여 "필요 이상으로 지불하는 것"을 멀리 하여 왔기에 부자가 된 것임을 기억하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따뜻한 삶은 오히려 청빈한 생활, 겸손한 성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생기는 여유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가 부자이든 가난하든 만족할 줄 아는 내적 힘을 가진 사람, 다른 사람을 배려해서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살 것이다." 물론이다. 그렇지만 인도의 인구 10억 명 가운데 90% 이상이 가난한 이유를 혹시 아는가? 현 세상은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며 내세가 진짜 인생이라고 믿는 힌두교 때문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적어도 노력은 해보고 나서 그런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인생은 어차피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철학에 빠져 있다면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돈이 아주 많이 생기면 자동적으로 불행하여진다는 공식을 이제는 버려라. 돈을 신포도라고 미리 단정짓고 뒤 돌아서는 여우가 되지도 말아라. 이것은 어떤 여자들이 아름다운 여자가 지나가면 " 저 여자는 행실이 좋지 못할거야, 남자관계가 복잡할거야, 성질이 있을거야, 화장발이야" 라고 생각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부자를 흉본다고 해서 그 부자가 가난해지는 것도 아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행복하게 살 수도 있듯이 돈이 많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당신도 부자가 되면 가족들과 행복하게 잘 살겠다는 것이 목표이지 않은가.
부자들을 모두 다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매도하거나 모두가 다 도둑놈들이라고 몰아 부치지도 말라. 물론 이 사회에는 정치적 결탁이나 부정한 방법을 써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몇 십 배 노력하여 세금 다 내고 떳떳하게 부자가 된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 머리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신문이나 방송에 나오는 부자들이 모두 다 어떤 부정한 사건과 연루되어 보도되는 부자들이기 때문이다. 땀흘려 떳떳하게 돈을 번 부자들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부자들은 없다고 믿는다면, 언론에 보도되는 흉악범들은 모두 부자가 아니므로 부자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흉악범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부자들을 일자 무식 장돌뱅이로 여기는 어리석음도 버려라. 2000년도 삼성전자 등기이사 20명에게 지급된 보수는 298억원으로 1인당 평균 14억9000만원으로 나타났다. 사외이사 6명을 빼면 사내이사의 평균 보수는 20억원 가량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엘리트 부자 계층이다. 일자 무식이 전혀 아니며 당신보다 훨씬 더 엘리트라는 말이다.( 물론 봉급을 많이 받는 이사들인 경우 그 봉급 중 일부가 회사의 비자금으로 다시 되돌려지는 경우도 때로는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중요한 사실은 부자를 불행한 도둑놈이라고 믿는 사람들 대다수가 내심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참 부자들까지도 모두 다 도둑으로 생각하고 불행한 삶의 소유자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왜 부자가 되려는 것인가? 사람들 머리 속에 부자는 불행한 도둑놈이라는 공식이 박혀 있는 한,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곧 똑같이 불행한 도둑놈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이런 사원이 문제 사원이다'(반드시 읽어라)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원이 과장의 생각을 알면 과장이 될 자질이 있는 것이며, 부장의 생각을 알면 부장이 될 수 있는 수준이고, 사장의 생각을 알면 사장이 될 자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부유하다는 것이 죄는 아니다. 고급 승용차 뒷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도둑으로 보인다면 당신은 결코 부자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 부자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제는 부자에 대해 억측하지 말라. 명심해라. 부자들에 대한 수많은 책들이 사실은 부자들이 쓴 고백서는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므로 부자들의 삶을 강 건너에서 바라 보고 추측하여 쓴 책들은 그 어느 것이든 무시하여라.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억측만 하면서 아는 체를 하기 마련이다"- 영화 '화인딩 퍼리스트'(Finding Forrester)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숀 코네리가 하는 말이다. 참 부자들의 생각과 마음을 배워라. 부자는 돈독이 들어 부자가 된 사람들이 아니다.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를 가져올 때 부자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환희를 느끼며 살아 온 사람들이며 당신의 생각과는 달리 전혀 불행하지도 않고 도둑놈도 아니다. .
sayno@korea.com , http://cafe.daum.net/saynolove 에 2004년 3월에 기고한 글
위 글을 다른 곳에 인용하는 경우 반드시 아래 내용까지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알림:
1. 신문이나 잡지 같은 언론 매체와 위 사이트에 기고된 저의 글은 그 글이 실린 곳의 이름과 날짜, 저의 이메일 주소 sayno@korea.com 을 명시하는 한,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나, 회비를 받건 안받건 간에 회원들만 읽을 수 있는 게시판에 수록할 경우 예외 없이 모두 불허합니다. 날짜를 밝혀 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 글이 발표된 시점에서 읽어야 하는 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저의 글을 판매 목적의 도서에 인용할 경우에는 저의 동의를 별도로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3. 위 사이트는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카페이지만 제가 운영하거나 개인적으로 관련된 곳은 아니며, 제가 글을 올린다고 해서 돈을 벌게 되는 사람이 생기는 곳도 아니고, 제가 말한 바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이기에 가끔씩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
부자들에게는 금덩어리가 없다
외환위기가 닥쳤던 1998년에 금모으기 행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지만 금덩어리라고 부를만한 것은 나오지 않자 금을 덩어리로 갖고 있을 부자들은 왜 금을 안 내놓느냐는 질타가 많았다. 정작 나눌 것이 많은 부자들은 놀부처럼 오장 칠부로 '욕심부'가 하나 더 있어서 그런지 금궤도 안 내놓고 금송아지도 안 내놓는다는 것이었다.
명심해라. 그런 글을 언론에 쓰고 방송에서 보도하는 방송작가나 드라마 작가, 기자, 앵커 등등이 실제로 부자들에 대하여 아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부자들에 대해 정말 수박 겉핥기로만 안다. 과연 진짜 부자들이 금은보화를 많이 갖고 있을까? 졸부라면 그럴 지도 모른다. 졸부를 영어로 머쉬룸(mushroom: 버섯) 부자라고도 하는데 비가 온 뒤의 버섯처럼 갑자기 확 피어났다는 뜻이다. 이런 부자들은 투자와 수익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다.
투자와 수익을 따지며 부자가 된 사람들이 과연 금덩어리를 갖고 있었을까? 외환위기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딸 아이가 내게 물었다: “우리 집은 부자인데 왜 금 반지 하나 제대로 없어?”
기축통화이던 금은 1971년 닉슨 미 대통령이 달러와 금의 태환정지를 전격 선언하면서 세계통화시장에서 퇴장하였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은 90년대까지도 금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고 오일쇼크나 전쟁, 일본인들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의 금 사재기 현상 등이 있게 되면 금값은 요동을 쳤다. 71년 미국이 달러의 금태환 금지를 선언할 당시 1온스당 200달러선에서 형성되던 국제 금값은 80년과 81년 1200달러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80년대부터 20여년간 금값은 계속 하락하는 양상을 보였다. 97년 400달러선이 무너진 뒤 99년 300달러선까지 무너졌으며 2001년 2월 253달러로 떨어졌다가 8월에는 다시 올라 280달러선이 되었다. 그러다가 2002년 부터 달러화가 약세로 돌아서면서 금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부자가 금을 보유한다면 투자 목적이거나 전쟁 같은 위험 대비용일 것이다. 하지만 2001년 11월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태 직후 금값은 290달러가 넘어갔으나 다시 하락하였고 탄저병 파문이 전해졌을 때는 285달러였다. 대단한 폭등이 일어난 것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지난 20여년간의 자료를 찾아 보라. 기본적인 대원칙은 미국 달러화가 약세로 돌아서면 금값은 언제나 강세로 돌아섰고 달러화가 강세로 돌아서면 금값은 다시 약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달러화에는 이자가 붙을 수 있지만 금에는 이자가 없다. 투자수익을 계산하는 부자들이 그런데도 금을 사서 몇 년이고 계속 보유할까? 주식과 마찬가지로 쌀 때 구입하였다가 가격이 오르면 팔아 치울 수는 있어도 장기 투자용으로는 그렇게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금을 사고 팔 때는 언제나 수수료까지 붙는다. 또한 전쟁터에서 금덩어리로 하는 물물교환은 언제나 금을 가진 사람이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전쟁터에서도 달러는 1불 단위로 거래가 가능하지만 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금가락지 하나 줄 테니 쌀을 달라고 하는 식이 된다는 말이다.
상속을 위한 방편으로 금을 사 둘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아니 현금을 이자까지 받아가며 숨길 수 있는 방법이 지천에 널려 있는데 왜 금을 보유한단 말인가. 오히려 재테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막연한 기대감으로 금을 산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렇다면 금괴나 금송아지는 누가 갖고 있는 것일까? 내가 아는 바로는 그런 것들은 대부분 수표추적을 피하고 현금전달시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한 뇌물로 사용되는 것이다. 서울 중심가의 금은방에 물어 보아라. 십중팔구 손님들이 선물용으로 사간다고 할 테니까. 나 역시 오래 전에 어느 거래처로부터 금으로 만든 왕관을 뇌물로 받았던 적이 있다(즉시 돌려주고 거래를 끊었다). 99년에 절도범은 “훔쳤다”고 하는데, 피해자는 “도둑맞은 적 없다”고 잡아떼는 사건들이 많았다. 경찰이 찾아낸 금은보화를 찾아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과연 금은보화는 누가 갖고 있었던 것일까? 부자라면 경찰에 가서 신분을 밝히고 찾아갔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고관이나 정치인이라면 나타나지 못한다. 뇌물로 받은 것일 테니까.
금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진짜 부자들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금이나 보석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에서 주인공 마틸드는 하급 관리의 아내였지만 화려한 생활을 동경하였다. 어느날 장관 부부가 주최하는 파티의 초대장을 받고 남편에게 옷이 없다고 탓하자 남편은 몰래 저금해 둔 4백 프랑을 내놓는다. 멋진 옷이 생겼지만 그녀는 보석이 없음을 다시 탓했고 친구인 돈많은 폴레스체 부인에게서 목걸이를 빌렸다. 파티에서 마틸드는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기품이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온 후 목걸이가 없어졌음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파리 시내를 헤매며 가까스로 폴레스체 부인의 것과 같은 모양의 목걸이를 찾아냈다. 남편은 아버지가 남긴 1만 8천 프랑과 모든 물건을 담보로 3만 6천 프랑짜리 목걸이를 샀다. 그 엄청난 빚을 갚기 위해 두 사람은 작은 셋방으로 옮겼고 닥치는 대로 일한다. 빚을 다 갚기에는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제는 늙어버린 그녀가 어느날 샹젤리제에서 폴레스체 부인을 만나게 되었을 때 자기가 빌렸던 그 목거리가 사실은 5백 프랑짜리 모조품이었음을 알게 된다.
모든 국어 선생님들은 이 이야기에서 허영심의 종말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강조하려는 부분은 마틸드의 허영심이 아니다. 돈많은 폴레스체 부인이 갖고 있는 목거리를 사람들은 왜 당연히 값비싼 목거리일 것으로 믿느냐는 것이다.
참 부자들은 부자가 아니었을 때 보석이나 패물에 돈을 쓰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무소유의 철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물론 아니다. 그들은 소유 욕망의 대상에 대하여 분석하고 그 다음에는 우선 순위를 파악한다. 왜냐하면 소유를 잠시 보류하면 돈이 쌓이고 그 돈에서 평생 여유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연예인도 아닌데 금은 보석을 치렁치렁 몸에 감고 다닐 것이라고 오해하지는 말라는 말이다.
( 내 아내는 어떨까? 부모도 없고, 형제자매라고 몇 있지만 모두 미국에서 산다고 그러고, 일가친척도 없고, 학벌도 뭐 보잘 것 없고, 미남도 아니고, 근육질도 아니고,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칼 같은 성격에다가, 빚도 왕창 있다고 하는 나이 서른의 남자를 그저 자기처럼 음악을 좋아하는-클래식 음악들로 내가 유혹을 좀 했다- 시티 보이라는 이유로 나에게 프로포즈한 여자가 보석이나 명품을 좋아 하였을 리 있겠는가. 어쩌면 아내 전공이 사회사업과이었기에 대학생 때 실습을 다니며 빈민들의 삶을 많이 보았던 것이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sayno@korea.com , http://cafe.daum.net/saynolove 에 2004년 3월에 기고한 글
위 글을 다른 곳에 인용하는 경우 반드시 아래 내용까지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알림:
1. 신문이나 잡지 같은 언론 매체와 위 사이트에 기고된 저의 글은 그 글이 실린 곳의 이름과 날짜, 저의 이메일 주소 sayno@korea.com 을 명시하는 한,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나, 회비를 받건 안받건 간에 회원들만 읽을 수 있는 게시판에 수록할 경우 예외 없이 모두 불허합니다. 날짜를 밝혀 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 글이 발표된 시점에서 읽어야 하는 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저의 글을 판매 목적의 도서에 인용할 경우에는 저의 동의를 별도로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3. 위 사이트는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카페이지만 제가 운영하거나 개인적으로 관련된 곳은 아니며, 제가 글을 올린다고 해서 돈을 벌게 되는 사람이 생기는 곳도 아니고, 제가 말한 바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이기에 가끔씩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
은행 저축은 목돈을 만들 때 까지만 해라.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누군가로부터 여러 가지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 말들에 은연 중 세뇌되어 살아간다. 나는 어릴 때 국산품을 사용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사회에 나와서 느낀 것은 내가 국산품을 사용하는 것과 내가 부자가 될 가능성과는 전혀 무관하였고 정작 부자가 되는 것은 그 국산품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전혀 몰랐고 내가 굶어 죽어도 그들에게 나는 언제나 타인이었다.
은행에 저축을 하여야 개인도 잘 살고 국가도 부강하여진다는 것 역시 우리에게 그렇게 세뇌되어 있는 말이다. 정말 그럴까? 언젠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내게 “학교 숙제인데 집에 있는 은행통장의 종류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달라”고 한 적이 있다. 학교에서 저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내 준 숙제였다. 내가 보통예금통장 두개 뿐이라고 하였더니 아이는, “우리 집은 목돈마련도 없고 정기예금도 없느냐”고 이상한 듯 물었다. 사실 나에게 은행은 생활비를 잠시 맡기거나 자동이체를 위한 곳에 불과하다.
70년대 초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부잣집 친구들의 아버지는 은행 고위층 사람이거나(아마도 그 중 상당수는 대출 커미션을 받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은행돈을 빌려 사업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은행에 저축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나는 내가 저축을 한 돈을 갖고 다른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싫었고 지금도 싫어한다. 처음부터 나는 은행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말이다.
20대에 내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천만원은 아줌마들과 함께 한 낙찰계를 통해서 였다. 하지만 계는 위험하므로 정말 믿을만한 계가 아니라면 꼬박꼬박 은행에 저축할 것을 권유한다. 단 목돈을 만들 때까지 만이다. 목돈을 오백만원이라도 만들면 그 돈은 수익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한푼이라도 이자를 더 많이 주는 곳을 찾아 다니라는 말이다.
은행에 저금을 많이 하여 저축상을 받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나는 그 많은 돈을 왜 은행에 계속 넣어둘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원금이 보호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종금사나 신용금고,조합 등과 같은 제 2금융권에 분산시켜 놓고 이자는 매월 은행으로 자동이체 시키면 어떨까? 그런 곳은 불안하고 찾아 다니기도 불편하고 시간이 소요된다고? 뭐가 불안하다는 말인가? 원금이 날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그렇다면 5천만원 원금이 보장되는 한도 내에서 하면 될 것 아닌가. 그래도 돈을 맡긴 곳이 문을 닫으면 몇 개월간 그 돈을 찾지 못하지 않느냐고? 그럴 수 있다. 몇 개월 이자를 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봤자 몇 %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정도는 날릴 각오를 하고 나는 언제나 고금리만 따라 다닌다. 하지만 원칙이 있다. 법으로 보장이 되는 한도 금액으로 여러 곳에 쪼개 놓는다는 것과 이자는 매월 자동 이체로 수령한다는 것, 갑자기 돈이 필요하게 될 때를 대비하여 일정액은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곳에 예치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나의 좁은 생각인지는 몰라도 어느 나라에서든지 은행들이 부실해지면 정부에서 쓰는 수법이 예금 보장 한도액 제도인 것 같다. 그렇게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비 맞은 참새처럼 불안감에 떨면서 자금을 제2금융권 보다는 그래도 더 안전하게 보이는 은행으로 옮기게 되고 은행들은 BIS 비율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맞추게 되어 안정화 단계로 들어가기 쉽다. 결국 불안감 조성은 은행을 살리기 위한 심리적 전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 즉 다른 금융 기관들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고 안정성을 담보로 하여 전략적으로 이자는 조금 줌으로서 예대 마진을 극대화 시켜 그 마진으로 부실을 털어내려는 속셈일 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투신사나 은행 중 자기네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광고하는 곳은 이자를 가장 조금 주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은행은 길 건너 가까이 있는데 제2 금융권 회사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시간도 걸리고 불편하다고? 도대체 당신 시간이 다른 일들에 얼마나 값지게 쓰이고 있기에 시간이 걸린다고 시간을 아까워하는가? 시간은 금이지만 부자가 아니라면 시간이 금이 아닐 경우가 많다. 불편하다고? 편리함은 언제나 당신의 돈을 빼앗아가는 원흉이다. 금융기관과 거래할 때 만큼은 불편함을 감수해라. 당신이 불편함을 느낄수록 돈은 쌓이기 마련이며 돈 찾기가 편리할수록 돈은 새나가는 법이다.
은행의 경우 우수고객이라는 말은 은행에 돈을 많이 기증한다는 뜻이다. 지점장실이나 VIP룸으로 안내되어 커피 한잔 마시는 대신 당신은 적어도 제2금융권보다 연2-3% 정도는 손해보고 있음을 기억하라. 가끔 은행에서 공연 티켓도 들어오고 무료건강진단도 받을 수 있기도 하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수수료 면제 역시 큰 도움이 못 된다. 인터넷으로 처리하면 수수료는 절감된다. 어느 은행이건 간에 우수고객이 받는 추가 예금 이율은 잘해야 연 0.5% 정도이다.
은행의 우수고객에게는 대출금리가 최대 연3% 까지도 감면된다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대출 받을 때가 되어 봐야 안다. 특히 예금담보대출은 엄청난 손해이다. 정기예금이자로 연4.5%를 받고 급전이 필요하여 예금담보로 7%로 대출을 한다면 2.5% 더 내는 것이 아니라 4.5%에 대한 세금액 까지도 당신이 부담하여야 한다. 원 세상에나.
신용대출이니 정책자금 대출이니 그럴듯한 것들도 많지만 당신을 뭘 믿고 그냥 빌려주겠는가. 물론 당신이 이름있는 직장에 다니면서 어느 한 은행을 계속 거래를 하여 왔다면 신용대출로 돈을 빌릴 수도 있겠지만 그 액수가 몇 천만원을 넘어가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역으로 생각해 보아라. 당신이 대출담당자라고 치자. 당신 같으면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 직장이 좋고 거래를 오래 해왔다는 이유만으로 선뜻 몇 천만원을 내 주겠는가? 그럴 리 없지 않은가. 당연히 담보를 요구할 것이다. 담보만 있으면 요즘은 어디서나 돈을 빌린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빚을 지지 말라고 외치는 사람임을 기억해라. 당신이 제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빌려 쓴 돈에 대해 지불하는 이자는, 당신이 그 어떤 금융기관에서 굴리고 있는 자금에 붙는 세후 이자 보다 언제나 많은 법이다. 나는 적금은 적금대로 들고 대출금은 대출금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도대체 왜 그 쉬운 산수도 못하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외환위기가 있었던 98년 초에 나는 은행에서 돈을 왕창 빌렸다. 나는 그 돈을 상호신용금고에 넣고 높은 이자를 받았는데 은행 대출 이자를 갚고도 돈이 남았다. 그때 이후로는 그런 재미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
기억해라. 그 어떤 금융기관이건 간에 그들이 당신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하는 자원 봉사자들은 절대 아니다. 금융기관의 정확한 표현은 금융회사이며 당신의 돈을 이용하여 스스로 부자가 되고자 애쓰는 영리 목적의 법인이다. 영리 목적으로 돈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으면 어떻게 될까? 나는 금융기관의 창구 직원은 물론 금융기관에 소속된 재테크 상담가의 말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린다. 은행에서는 자기들 상품에 가입하라고 하고 보험회사에서는 보험을 권유하고 증권회사는 자기들 상품을 권유할 것 아닌가. 금융기관에 종사하는 사람이 "저희한테 돈을 맡기지 마시고 이러 저러한 곳에 가셔서 이렇게 하시면 이자를 이만큼 더 받으실 수 있습니다"라고 당신에게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다행히도 요즘은 인터넷 상에서 금융 상품들을 비교하여 정보를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이 여러 곳이 있다. 그런 사이트들을 수시로 방문하여 금리 변동 상황을 객관적으로 비교하여 스스로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라. 당신이 모르면 모르는 만큼 호구가 되어 버리는 것이 머니 게임이다.
( 당신이 금융기관이나 재테크의 “기본 조차 모르고 있다면” 전직 은행원 출신의 일본인 요코다 하마오의 '부자는 20대에 결정된다'를 나이와 상관없이 읽어라. 하지만 이 책의 내용 중 부자들의 특성으로 나오는 "배냇 저고리,아기수첩,초등학교 성적표 등을 간직해 둔다"는 것은 일본의 부자들에게 물어보니 보편적인 특성 같지는 않으며 저자가 가난뱅이가 되는 지름길로 말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적용이 잘못되었음을 염두에 두어라.
이상건 기자의 '돈 버는 사람은 분명 따로 있다'도 읽어라. 이 책은 재테크의 기초원리를 다루고 있기에 내가 난생 처음 추천사라는 것을 써 준 책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의 원고를 읽었을 때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심하게도 도대체 이런 기초적인 것도 모른단 말인가?”하는 생각을 하였는데 저자의 말은 “대다수가 그렇다”는 것이었다. 쯧쯧 )
sayno@korea.com , http://cafe.daum.net/saynolove 에 2004년 3월에 기고한 글
위 글을 다른 곳에 인용하는 경우 반드시 아래 내용까지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알림:
1. 신문이나 잡지 같은 언론 매체와 위 사이트에 기고된 저의 글은 그 글이 실린 곳의 이름과 날짜, 저의 이메일 주소 sayno@korea.com 을 명시하는 한,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나, 회비를 받건 안받건 간에 회원들만 읽을 수 있는 게시판에 수록할 경우 예외 없이 모두 불허합니다. 날짜를 밝혀 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 글이 발표된 시점에서 읽어야 하는 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저의 글을 판매 목적의 도서에 인용할 경우에는 저의 동의를 별도로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3. 위 사이트는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카페이지만 제가 운영하거나 개인적으로 관련된 곳은 아니며, 제가 글을 올린다고 해서 돈을 벌게 되는 사람이 생기는 곳도 아니고, 제가 말한 바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이기에 가끔씩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
아무 일이나 재미있게 하라.
VJ 특공대라는 TV 프로그램을 딸과 함께 자주 보았는데(나는 쇼,드라마 등은 보지 않는다) 언젠가 어느 삼겹살집 주인이 삼겹살은 그 굽는 석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에 드는 석판을 구하고자 전국을 돌아다니고 그렇게 구한 돌들을 삶고 길들이는데 오래 동안 정성을 쏟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그 주인에게 있어 삽겹살집 운영은 노동이 아니라 재미를 느끼는 취미나 다름 없었다. 당연히 손님이 들끓었다.
많은 부자들은 일하는 것이 취미라고 말한다. 재미있게 즐긴다는 뜻이다. 토마스 J. 스탠리는 '백만장자 마인드'에서 미국의 백만장자 733명을 표본 조사하여 얻은 자료들을 보여주는데 미국의 백만장자들 중 86%는 "나의 성공은 내 일과 직업을 사랑한 결과이다"라고 공통적으로 말한다.( 투자를 잘해야 부자가 된다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 일이 우선이고 투자는 나중이다, 이 바보들아.) 그리고 81%는 "나의 일은 내 능력과 적성을 한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 능력과 적성에 맞는 일만을 찾아 나서는 것은 내가 볼 때는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게다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가 머리 속에서 꿈꾸고 원하여 온 일”을 그 일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도 없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과 동일시하거나 “자기가 능력을 갖고 있는 일”,“ 자기 적성에 맞는 일”,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로 믿는다. 그러나 능력이니 적성이니 하는 것들은 관련 분야의 지식을 갖춘 뒤 실제로 일을 경험하여 보기 전 까지는 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적성검사라는 것을 너무 믿지는 말라는 말이다. (나는 학교에서 적성검사를 받을 때 마다 뭐 하나 유달리 적성이 뛰어난 것으로 나온 분야가 전혀 없었다.)
정말 그러냐고? 미국 백만장자들의 경우를 좀 더 살펴보자. 그들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일어나 자기 능력과 적성에 맞는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 일은 천재들에게나 일어난다. 백만장자들이 일을 택하게 된 동기는 그저 우연한 기회(29%), 시행착오(27%), 예전 직업과의 관련성(12%), 이전 고용주가 놓친 기회(7%) 때문이다. 이 수치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공부를 잘 해서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 직업인이 되어 부자가 된 사람들도 포함시킨 것이므로 그들을 제외한다면 거의 대다수의 백만장자들은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며, 어쩌다 하게 된 일이 시발점이 되어 돈을 벌었다는 뜻이다.
진실은 이것이다. 백만장자들은 "어떻게 하다 보니까 하게 된 일"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그 일을 사랑하고 즐김으로써 "능력과 적성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일"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내 말을 믿어라. 마크 피셔(Mark Fisher)와 마크 앨런(Marc Allen)의 공저 “백만장자처럼 생각하라”( How to think like a millionare) 에서도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일을 사랑한다”고 단언한다.
정말 그것이 부자들의 진실이다. (현대그룹 창업주 고 정주영 회장이 적성을 찾아 쌀 가게 점원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빌 게이츠가 적성에 따라 컴퓨터를 배워야겠노라 사전에 굳게 결심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라.) 내 말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고? 혹시 “젊어서 은퇴하기”라는 책 제목을 들어본 적 있는가? 있다고? 나는 그 책을 펼쳐 보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부자가 되면 일은 더 이상 안하고 젊어서 은퇴하겠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복권에 당첨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질문: 진짜 부자들이 일찍 은퇴하는 것을 본 적 있는가? 환갑 아니라 70세,80세 , 아니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죽을 때 까지 일에서 손을 완전히 놓지 않는 사람들이 부자들이다. 일 하는 것이 재미있어 죽겠는데 은퇴를 해? 그것도 젊어서 돈을 벌어 놓은 뒤 은퇴를 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일이 재미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 지겨운 일에서 좀 벗어나고 싶겠는가. 그렇게 일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그것도 젊어서 부자가 되어 은퇴를 한다고? 투자를 잘해서? 무슨 돈으로 투자를 한단 말이냐. 개떡 같은 소리 그만들 해라.
나도 20대에는 그런 생각을 하였었다. 그리고 실제로 39살에 평생 먹고 살만한 재산이 모인 것 같아 은퇴 시도를 했는데 곧 다시 일을 손에 잡았다. 왜 그랬을까? 일 하는 재미를 대체할 만큼 매력적인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나는 45세에 절반은 은퇴하였다. 절반이라고 함은 일을 하기는 하지만 취미생활도 많이 하기 때문이다.)
나는 10가지 이상의 많은 분야에서 일을 하였다. 그 일들 중에서 내가 사전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일은 단 하나, 음향기기 분야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어쩌다 보니 발을 내 밀게 된 일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분야에 발을 내 밀던 간에 나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 그 분야에서 귀신이 되고자 노력을 하였다는 점이다.
우선 무슨 일에 뛰어 들던지 간에 모든 관련 지식을 책을 통해 공부하는 것은 언제나 필수였다. 나는 그런 책들을 구입하는데 돈을 아낀 적이 없다. 하지만 낮에는 일 때문에 책을 볼 시간이 없으므로 자연히 저녁시간과 휴일을 이용하여야 했다. 시간을 아껴야 했기에 출퇴근 거리는 무조건 짧아야 하였고 차 타는 시간도 아껴야 하였기에 기사를 일찍부터 두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노는 날들을 기다리기는 했지만 기다린 이유는 전혀 달랐다. 크리스마스 이브이건 내 생일이건 간에 나는 가리지 않았다. 특히 내 생일에 놀게 되면 나는 기분이 아주 찝찝해 지곤 했는데 열심히 사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알게 된 것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컴퓨터를 전혀 몰랐던 내가 MS-DOS도 알게 되고 d-Base 로 프로그램을 짜서 팔 수도 있었던 것도 근 몇 개월간 저녁과 밤 시간을 몽땅 희생시켜 얻은 결과였다. 그 덕에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시도한 광고대행업 이외에서는 사업에서 손해를 본 일이 없었다. 명심해라. 내가 믿고 있는 원칙은 단 하나, 모르면 괴롭고 알면 즐겁다는 것이다.
학창시절을 돌이켜 생각하여 보아라. 누구나 자기가 잘하는 과목은 공부에 재미를 느끼지만 잘 못하는 과목은 정말 지겨워 한다. 무엇인가를 잘하면 재미를 느끼기 마련이고 잘 못하면 재미고 뭐고 없지 않겠는가. 즉 재미를 느끼느냐는 것과 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데에는 비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잘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기에 가능하며, 잘하니까 재미도 생기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 어떤 과목을 지겨워 하였었는데 그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미남 총각이어서(혹은 예쁜 여선생님이어서) 관심을 쏟아가며 열심히 하게 되었고 하다 보니 많이 알게 되어 잘하게 되고 잘하게 되니 성적도 잘나오고 칭찬도 받으니 재미도 많이 느끼고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실제로 주변에 널려 있지 않은가.
결국 어떤 일에 대한 재미는 그 일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을 쏟고 관련된 지식을 얼마나 많이 갖고서 경험하는가에 따라 좌우되는 문제이다. 부자들은 초기에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우선은 그 일의 구조 전체를 파악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흡수하고 경험을 하다 보니 점점 더 많이 알아 가게 되고 더 많이 알기에 재미도 느끼고 돈도 벌게 되니 즐거움도 배가 된다. 하기 싫은 일이란 것이 적어도 부자가 되는 과정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반면에 대개의 사람들은 일을 사랑하지도 않으며 즐기지도 못한다. 그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억지로 한다는 생각을 한다. 경고: 당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평생 당신 목구멍은 포도청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왜 사람들은 일을 재미나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일을 완전히 알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문직 종사자들도 면허증이나 자격증 하나를 따면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이다.“지금은 임시로 남성복 판매사원 일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멍청하긴…. 바로 그 남성복 코너에서 옷감의 종류부터 시작해서 안감,양복부속의 종류,단추,지퍼 등의 가격 및 구입처 등은 물론 재단과정, 원가계산, 고객만족 등을 배워야 할 것 아닌가.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아니, 평생 가난하게 살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일은 자기에게 맞는 일이 아니며 임시로 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고 다른 일을 하게 되기를 꿈꾼다. 그러면서 그 다른 일을 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여러 종류의 학원들에 돈을 갖다 바친다(그 덕에 돈 많이 버는 학원 중 하나가 공인중개사 학원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막상 그 다른 일을 하게 되어도 또 다시 “이게 아닌데…” 하면서 다른 직업을 찾는다. 그 결과 뭐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오해하지 말라.“한 우물만을 계속 파라”는 뜻이 절대 아니다. 애당초부터 가까이 가서는 안될 우물도 있다("이런 일은 하지 말아라" 항목을 참조하라). 하지만 처음부터 가까이 가서는 안될 우물이 아니라면 어느 우물이건 그 우물 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 즉 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엿 같이 생각되어도 그 구조체와 흐름을 완전히 파악하여야 하며 거기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스폰지처럼 흡수해 나가야 한다.
물론 근무 중에는 배울 시간이 별로 없을 것이다. 때문에 일과 후의 시간들을 몽땅 바쳐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그 우물터에서는 귀신이 되게 된다. 부자가 되려면 이 원칙을 평생 잊지 말라. 사람들은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격상의 문제나 기술적 분야가 아닌 이상 어느 한 분야의 일에서 새는 바가지는 다른 분야의 일터에서도 새기 마련이며, 어느 한 분야에서 귀신이 되는 사람은 다른 일을 해도 중복되는 부분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남들보다 빠른 시간 안에 귀신이 되게 된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세번은 질리고 다섯번은 하기 싫고 일곱번은 짜증이 나는데 아홉번은 재가 잡힌다." 재가 잡힌다는 말은 일에 리듬이 생겨 묘미가 생긴다는 말이다. 즉 피곤을 가져오는 "노동"이 더 이상 아니고 재미를 느끼게 되는 단계인 "일"이 되게 된다는 말이다. 당신이 하는 것이 "노동의 파편"으로 남아있는 한 당신은 언제나 "노동의 노예"로 남아 있게 되고 평생을 돈에 휘어 잡힌다. 두렵지 않단 말인가!
sayno@korea.com , http://cafe.daum.net/saynolove 에 2004년 3월에 기고한 글
위 글을 다른 곳에 인용하는 경우 반드시 아래 내용까지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알림:
1. 신문이나 잡지 같은 언론 매체와 위 사이트에 기고된 저의 글은 그 글이 실린 곳의 이름과 날짜, 저의 이메일 주소 sayno@korea.com 을 명시하는 한,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나, 회비를 받건 안받건 간에 회원들만 읽을 수 있는 게시판에 수록할 경우 예외 없이 모두 불허합니다. 날짜를 밝혀 달라고 하는 이유는 그 글이 발표된 시점에서 읽어야 하는 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저의 글을 판매 목적의 도서에 인용할 경우에는 저의 동의를 별도로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3. 위 사이트는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카페이지만 제가 운영하거나 개인적으로 관련된 곳은 아니며, 제가 글을 올린다고 해서 돈을 벌게 되는 사람이 생기는 곳도 아니고, 제가 말한 바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이기에 가끔씩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
|
|
|
|
|
|
|